바람과 나 - 한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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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나 한대수 작사/ 작곡 끝 끝없는 바람
신세계 레코드 (1977) 1975년 한 해를 마감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인 12월 어느날 김포공항 대합실.긴 머리에 청바지 차림의 한 청년이 초췌한 모습으로 뉴욕행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한국 가요계에 파문을 일으키며 청년문화를 주도하던 가수 韓大洙(50)였다.미국 유학후 숨가쁘게 살았던 한국에서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 갔다.자신의 음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 땅의 분위기가 한스럽기만 했다.채 피어나기도 전에 꺾여진 꽃처럼 자신의 음악을 가슴에 묻은 채 한대수는 그렇게 훌쩍 한국을 떠났던 것이다. 짧은 활동기간에 비해 뚜렷한 인상을 남긴 이색적인 경력의 싱어 송라이터.통기타와 자유의 청년문화를 생겨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 트로트와 사랑타령 일색이던 대중가요를 뿌리째 뒤흔들며 젊은이들의 우상이 됐던 가수 韓大洙.그는 왜 한국을 떠나야만 했을까. 어린시절부터 남달리 굴곡이 많은 개인적인 삶을 살았던 그였다.핵물리학자인 아버지의 실종으로 7살때부터 줄곧 조부모와 함께 살았다.10살때 미국으로 이주해 3년간 미국생활을 한 뒤 돌아와 한국에서 중학교를 마쳤다.17세때 미국에 사는 아버지의 소재가 확인돼 다시 미국으로 옮겨 고교를 다녔지만 적응하지 못한채 방황의 10대를 보냈다.韓씨의 재능은 이때 발견된다.상담교사의 도움으로 시와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나중에 국내에서 히트했던 ‘행복의 나라로’‘그날까지’‘옥의 슬픔’ 같은 노래들이 모두 이때 쓴 것이다.고교졸업후 뉴햄프셔 대학 축산과에 진학했으나 적성이 맞지않아 중퇴,뉴욕 사진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귀국한 게 1968년 초.이때 한국의 가요사는 다시 쓰이게 된다.당시 국내 가요계는 트로트가 지배하던 시기.국내에선 처음으로 싱어 송라이터로 데뷔한뒤 발로뛰는 음악인의 생활로 접어든다. 서울 무교동의 ‘세시봉’과 명동의 ‘오비스캐빈’에서 청바지,가죽장화 차림에 통기타 하나들고 포크록을 소개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이듬해인 69년 이렇다할 공연무대에 서기엔 아직 무명가수였던만큼 대학가를 돌기 시작했다. 총학생회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공연을 의뢰해 축제기간중 이화여대와 서울대,서강대,부산대 강당공연을 통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이때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인상지워지게 됐다.그리고 그해 겨울 그 유명한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 공연.그때만해도 드라마센터는 고상한 장르의 유명인들에게만 공연이 허용되던 곳 .무명의 대중가수가 무대에 오른 것 자체가 화제거리였다.평소 韓씨의 음악에 매료된 팬들이 어렵게 마련한 데뷔 콘서트였다.벼르고 별렀던 무대였던 만큼 혼신을 다한 공연이었다.이틀 공연 모두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대성공이었다. 74년 군에서 제대하고 나니 유명해져 있었다.자신이 곡을 쓰고 金敏基가 부른 ‘바람과 나’,楊姬銀이 부른 ‘행복의 나라’가 인기곡으로 불려지고 있었다.신세계레코드사에서 앨범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그래서 만든 첫 앨범이 ‘멀고 먼 길’이다.너무나도 반가운 제의라 하루만에 녹음을 모두 마쳤다.‘물좀 주소’‘행복의 나라로’‘바람과 나’등 수록곡들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그리고 1년도 채 안돼 시련이 닥쳐왔던 것이다. 75년 가을 두번째 앨범을 만들었다.코리아헤럴드 기자로 재직중일 때였다. 기자로 일하면서 오후엔 남모르게 레코드 취입을 하느라 코피를 쏟기가 일쑤였다.마침내 레코드가 나왔다.이제 자신의 음악을 인정받는 뿌듯함에 마냥 들떠 있었다.기쁨은 채 2주가 못돼 좌절로 바뀌었다.당시 문공부에서 레코드 수거령이 떨어졌다.체제전복적음악이란 낙인이 찍혔다.첫 앨범 ‘멀고 먼 길’도 함께 묶였다. “‘물좀 주소’등 히트곡들이 대학생들 사이에 번져가면서 정치 사회상황에 맞물려 당국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던 게 사실입니다.당국이 ‘물 좀 주소’에선 물고문을 연상했던 것 같아요.두번째 앨범은 표지가 문제였지요.녹슬은 철조망에 고무신이 걸려있는 모습인데 한국적 정서와 민중을 상징한 것이지요.죄수(철조망)가 흰 고무신을 신으니 박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었지요” 동양방송과 기독교방송 음악프로 출연도 막혔다.어쩔 수 없이 명륜동 자취방에서 직접 노래하고 녹음한 테이프를 만들어 매장에 내다 팔았다.테이프는 열악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이 테이프는 첫 앨범 취입 전부터 하나 둘씩 만들었던 것으로 이렇게 만든 테이프만도 100여개가 넘는다.하지만 그것도 잠시뿐.감시망이 좁혀지면서 테이프 제작도 할 수 없게 됐고 더이상 설 땅이 없어 졌다.마침내 미국행을 결심했다.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면서 시 사진 음악활동을 계속했다.89년 ‘무한대’,90년 ‘기억상실’,91년 ‘천사들의 담화’ 등 레코드도 세 집을 냈다.종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자신의 삶을 담은 노래들이다.지난해 가을엔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록그룹 10개가 참가한 록페스티벌에도 참가했다.80년 일시 귀국해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약식 공연을 가진지 17년만의 무대였다.그리고 지난달 잠시 귀국 해 자전적 에세이집을 냈다.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기록이다. 75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는 韓씨는 이렇게 말한다.“그 시대 정책 자체에 반감을 가진 적은 없습니다.어느 나라나 국가정책과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정신은 엇갈리기 쉽지요.당시 정부의 목적의식을 흐리는 활동이 제재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문화예술인들이 심한 갈증을 느끼는건 당연했구요. 오랫동안 나를 못봐온 팬들을 위해 개인무대를 갖고 싶습니다” <金聖昊 기자 kimus@seoul. co.kr>
귀국전 미국 생활에서 반문화운동(카운터 컬쳐 무브먼트) 경향의 포크록에 심취했던 만큼 국내에서의 활동도 자연스럽게 자유와 젊음으로 대변되는 이 음악으로 시작됐다.미국 고교시절 답답한 생활을 노래에 담은 노래들이 70년대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금지곡이 된 것은 우연의 일치다.대학가를 돌면서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인상지워지고 금지문화의 한 주역이 된 것도 사실상 노래말의 상징성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물좀주소’와 ‘행복의 나라로’는 그의 대표적인 노래.“물좀 주소 물 좀 주소/목마르요 물좀 주소/물은 사랑이요 나의 목을 간질며/놀리면서 밖에 보내네/아 가겠소 난 가겠소/저 언덕위로 넘어 가겠소/여행도중에 그 님 만나 본다면/난 살겠소 같이 살겠소”(물좀 주소). “장막을 걷어라/나의 좁은 눈으로 이세상을 더 보자/창문을 열어라/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봄과 새들의 소리/듣고싶고 울고 웃고 싶소/내 마음을 만져줘/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행복의 나라로) 유신정권의 압제 아래서 자연스럽게 현실 비유적인 내용으로 인식될 수 있었고 대학가에선 더욱 인기가 좋았다.물은 갈증을 해결하는 그 무엇이며 행복의 나라는 답답한 상황으로부터의 탈출과 희망의 의지가 역력한 상징임에 틀림없다.특히 金敏基 楊姬銀 등 사회성짙은 노래를 주로 불렀던 이들에 의해 불려지면서 자연스럽게 화살이 겨냥 됐고 마침내 철조망과 흰 고무신을 표지 사진으로 쓴 ‘고무신’ 앨범으로 피할 수 없는 족쇄가 채워진 것이다.‘자유의 길’‘병든 고아’‘술 취한 여자’‘물좀 주소’ 등 노래마다 일일이 검열을 당했고 레코딩까지 허락됐던 앨범 몰수는 韓씨를 떠나게 만들고야 말았다 . ◎그의 길 ▲48년 부산출생.
포크음악의 창시자 "한대수" 2006-07-28
일상을 견뎌내는 수많은 '보통 사람'과 달리 영혼이 자유로운 인간이 있다. 목마름만을 강요하는 넝마의 세상을 향해 당당하고 꼿꼿한 자세로 '내게 물을 다오'라고 말할 수 있는 크나큰 용기. 그런 용기를 가진 삶은 비록 험난할지라도 빛나기 마련이다. 작사와 작곡을 겸하는 가수(싱어송라이터)에서 광고사진 작가로, 여행 속에서 인간과 세상의 진리를 찾아가는 방랑자에서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은 백전노장의 록커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바꿔온 한대수(59)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보헤미안 이자 아방가르드적 사고의 전환을 보여준 한대수(1948년)는 한국적 포크 음악의 창시자이자, 자신의 생각을 음악으로 가장 리얼하게 표현한 시인이요 아티스트였다. 그의 음반 활동은 부침을 거듭하며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고 실험을 거듭하며 이 땅의 뮤지션들과 음악애호가들에게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이 땅의 음반 산업은 이 고독한 선구자를 시대의 부랑아로 만들었다. 그는 어린 시절 핵물리학자인 아버지의 실종으로 조부모와 살았으나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소식을 접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한동안 외국 생활을 적응하지 못했던 그는, 홀이라는 상담교사를 만나면서 음악에 대한 자신의 능력을 감지하게 된다. 대학에서 수의학을 전공하다 사진학교를 다니며 사진에 취미를 붙인 한대수는 1968년 귀국해 국내에서 포크가수의 삶을 시작한다. 디자인 포장센터에서 3급 공무원 디자이너로 일하며 대학가에서는 자신의 철학과 인생이 담긴 노래로 인상적인 공연을 펼친 그는, 자신이 만들고 김민기가 부른 '바람과 나'와 양희은이 부른 '행복의 나라'로 청중을 사로잡는다. 복잡한 가정사와 미국과 이 땅을 오가는 모호한 정체성은 한대수 음악의 밑천일지도 모른다. 2000년 작품인 ‘eternal sorrow'의 커버에서처럼 그의 삶은 일그러진 고통의 연속이었고 그것은 그가 rocker로서 끝없는 저항의 개인사(個人史)를 꾸밀 수 있는 정신적 배경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성향은 그가 이룬 로커로서의 성과에 대한 온전한 평가에 어려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 한대수는 전설적인 69년 남산 드라마 센타 공연을 통해 충격적으로 등장을 했다. 그리고 1974년에 ‘물 좀 주소’,‘행복의 나라’가 실린 ‘멀고 먼 길’로 앨범 데뷔를 했다. 사진은 또 하나의 탈출구 하지만 70년대 한대수는 군사정권의 기피인물이었고 80년대 이후에도 그는 음반제작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이 위대한 뮤지션은 여전히 전세 오피스텔을 전전하며 생활고를 겪어야만 했고 조용필이 성대한 콘서트를 기획할 때 조촐한 소극장 공연에 만족해야만 했다. ‘물 좀 주소’의 일그러진 보컬과 스트로킹 연주는 동시대 모던포크의 범주로 담아두기 어려운 파격적이었다. 그의 목소리로 당시 힘들게 살고있는 민초(民草)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앨범인 ‘고무신’에서는 철조망에 걸린 고무신 사진을 자켓으로 담아 암울한 당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군사정권의 긴급조치 시대에 달가운 것은 아니었고 ‘멀고먼 길’과 ‘고무신’ 앨범은 바로 판매 금지 처분을 당하게 된다. 특히 ‘고무신’ 앨범은 오리지널 마스터링 원판마저 소각해 버리는 바람에 복각에도 애를 먹었다고 한다. 한대수가 음악만큼이나 좋아하는 게 사진이라는 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 몇 권의 사진집을 출간하기도 한 그 역시 "앞으론 사진작업 쪽에 좀 더 큰 방점을 찍고싶다"고 말한다. 좀 더 구체적인 걸 묻는 질문에 그는 '고비 퀸(고비사막의 여왕) 프로젝트'에 관해 설명했다. 동양적 신비로움을 지닌 여성을 고비사막으로 데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드를 찍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췄다. 지난해 초겨울 출간된 책 <올드보이 한대수>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청년시절 그를 매혹시킨 뮤지션 지미 헨드릭스, 밥 딜런, 섹스 피스톨즈에 얽힌 추억은 물론, 뉴욕에서 만난 온갖 예술가들과의 후일담, 여기에 자신의 여성관과 세계관까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책은 그의 '예술적 자서전'이라 이름 붙여도 무방할 정도다.게다가 직접 찍어 책 곳곳에 실은 사진들은 한대수의 재능이 단지 음악에만 멈춰있지 않는다는 걸 극명하게 보여준다. 구사하는 문장 역시 어지간한 작가들을 찜 쪄 먹을 정도로 세련됐다. 자료조사와 취재의 철두철미함은 책의 신뢰성을 한층 높이고 있다. 그의 사랑 역시 드라마틱하다. 그의 삶에서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사람. 22살 연하 러시아인 아내다. 옥사나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다. 한국인 아내와 89년 이혼 후 4년째 독신생활을 하던 중 직장 동료인 러시아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그곳에서 옥사나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옥사나의 밝고 거침없는 웃음소리와 솔직한 태도에 마음이 끌려 끊임없이 사랑하며 살고 있다는 그. 제국주의의 욕망이 베트남을 시커먼 포연으로 뒤덮었던 1960년대 후반. 한대수는 머리에 꽃을 꽂은 수천 명의 히피들이 "우리에게 탱크 대신 꽃을 달라"고 외치던 반전시위를 바로 눈앞에서 지켜봤다. 그 평화적인 행진을 목도한 청년 한대수는 '사랑을 꿈꾸는 천진한 평화주의자'가 됐다. 그날 획득한 정체성은 사십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도 변함이 없다.
경 력 1966 미 뉴햄프셔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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